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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숙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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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류숙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서령, 자는 순부, 호는 사암이며 시호는 문휘공이다. 1340년 문과에 급제하여 공민왕의 측근에서 원나라에 머물며 시학을 지냈다. 공민왕 즉위 후 1차 반원 자주 개혁 정치를 주도했으나 친원 세력의 반발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등용되어 2차 개혁을 추진하며 친원 세력을 제거하고 요동을 수복하는 등 반원 자주 개혁 정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361년 동지공거를 맡아 인재를 등용했으며, 신돈의 등장 이후 은퇴했으나 신돈의 참소로 인해 1368년 영광에서 자객에게 교살당했다. 사후 공민왕은 그의 억울함을 밝히고 문희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묘정에 배향되었다.

2. 생애

류숙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공민왕의 반원 자주 개혁 정치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인물이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고려에 돌아와 1차 반원 자주 개혁 정치를 주도적으로 설계하고 추진하였다. 그러나 친원파 세력의 반발과 원나라 승상 탈탈의 압력으로 파직되었다. 조일신의 난이 평정된 후 다시 등용되어 기철 등 친원파 세력을 제거하고 정동행중서성 이문소를 폐지하는 등 2차 개혁을 추진하였다. 또한 압록강 서쪽 8참과 파사부 등 3참을 격파하여 요동을 회복하고 쌍성 등지를 수복하게 하였다. 몽고풍을 일소하고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백성들의 어려움을 구제하는 데 힘썼다.

벼슬은 도첨의찬성사, 상의회의도감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 영서운관사에 이르렀다. 신돈이 등장한 이후, 공민왕에게 간청하여 은퇴하고 고향에 은거하였다. 그러나 신돈은 류숙의 복직을 두려워하여 계속 참소하였고, 결국 류숙은 장형을 받고 가산을 몰수당했다. 1368년, 류숙은 영광군(靈光郡)에서 신돈이 보낸 자객에게 교살당했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서령을 본관으로 하는 고려 후기의 문신이다. 자는 순부(純夫), 호는 사암(思庵), 휘호는 문휘공(文僖公), 봉군은 서령군(瑞寧君)이다. 1331년(충혜왕 원년)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1340년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좌주(座主)는 김영돈과 안축이었다. 1341년 강릉대군(후에 공민왕)의 시학(侍學)이 되어 원나라에서 공민왕의 곁을 지켰다. 1346년 잠시 귀국해서 춘추수잔(春秋脩撰)과 편수관(編修官)이 되어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의 실록을 편수하고 다시 원나라로 돌아갔다.

1355년 성균시를 주관하여 전익 등 99명의 인재를 뽑았다. 1361년 홍언박과 함께 동지공거(同知貢擧)를 맡아 문과를 주관하여 박실, 정도전, 이숭인, 안경온, 강호문, 설장수, 김자충 등 33명의 문생을 뽑았다.

2. 2. 공민왕 즉위와 반원 개혁 정치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함께 고려에 돌아와 1차 반원 자주 개혁정치를 주도적으로 설계하고 추진하였다. 하지만 친원파 세력은 강력하게 반발하였고 원나라의 승상(丞相) 탈탈은 핵심자인 류숙과 김득배를 ‘섬인(憸人)’으로 지목하여 그들의 처벌을 요구하여 결국 공민왕은 이들을 파직(罷職) 하였다. 조일신의 난이 평정(平定)된 후 다시 등용(登庸)되어 2차 개혁을 추진하여 기철 등 28명의 친원파 세력들을 일시에 제거하고 정동행중서성 이문소를 파하고 압록강 서쪽 8참(八站)과 파사부 등 3참(站)을 격파(擊破) 요동을 회복하고 쌍성 등지를 수복(收復)하게 하였다. 몽고풍을 일소하고 전민변정도감을 통하여 백성들의 어려움을 구제하였다. 원나라에 대한 간섭을 제거하고 반원 자주 개혁정치를 성공시켰다.

2. 3. 몽고풍 일소와 전민변정도감 설치

공민왕이 즉위하자 류숙은 고려에 돌아와 1차 반원 자주 개혁정치(反元 自主 改革政治)를 주도적으로 설계하고 추진하였다. 하지만 친원파 세력은 강력하게 반발하였고 원나라의 승상(丞相) 탈탈(脫脫)은 핵심자인 류숙(柳淑)과 김득배를 ‘섬인(憸人)’으로 지목하여 그들의 처벌을 요구하여 결국 공민왕은 이들을 파직(罷職) 하였다. 조일신(趙日新)의 난이 평정(平定)된 후 다시 등용(登庸)되어 2차 개혁을 추진하여 기철 등 28명의 친원파 세력들을 일시에 제거하고 정동행중서성 이문소(征東行中書省理問所)를 파하고 압록강 서쪽 8참(八站)과 파사부(婆娑府) 등 3참(站)을 격파(擊破) 요동을 회복하고 쌍성(雙城) 등지를 수복(收復)하게 하였다. 몽고풍을 일소하고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통하여 백성들의 어려움을 구제하였다. 원나라에 대한 간섭을 제거하고 반원 자주 개혁정치(反元 自主 改革政治)를 성공 시켰다.

2. 4. 인재 등용

1355년(공민왕 4년) 성균시를 주관하여 전익 등 99명의 인재를 뽑았다. 1361년(공민왕 10년) 홍언박과 함께 동지공거(同知貢擧)를 맡아 문과를 주관하여 박실, 정도전, 이숭인, 안경온, 강호문, 설장수, 김자충 등 33명을 선발하였다.

2. 5. 신돈과의 갈등과 죽음

1361년 홍언박과 함께 동지공거(同知貢擧)를 맡아 문과를 주관하여 박실, 정도전, 이숭인 등 33명을 선발하였다. 공민왕에게 간청하여 은퇴하였으나, 신돈은 류숙의 복직을 두려워하여 참소하였다. 결국 류숙은 장형을 받고 가산을 몰수당했으며, 1368년 영광군(靈光郡)에서 신돈이 보낸 자객에게 교살당했다.

3. 사후

신돈이 처형된 후 왕은 비로소 모든 사정을 알고는 류숙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고 조서를 내려 그의 억울함을 밝혀 주었으며, 문희(文僖)라는 시호를 내렸다. 1376년(우왕 2) 11월 공민왕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류숙은 총 5회에 걸쳐 공신(功臣) 칭호를 받았는데,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횟수공신호
1연저수종공신(燕邸隨從功臣)
2안사공신(安社功臣)
3충근절의찬화공신(忠勤節義贊化功臣)
4흥왕토적공신(興王討賊功臣)
5배향공신(配享功臣)



이와 같이 류숙은 고려 충신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4. 가족 관계

관계이름
증조부류공기(柳公器)
조부류굉(柳宏)
아버지류성계(柳成桂)
어머니강문세(姜文世)의 딸
첫째 부인청주(淸州) 양씨(楊氏)
장남류실(柳實)
차남류후(柳厚)
첫째 사위김자충(金子盅)
둘째 사위최정유(崔正濡)
둘째 부인오씨(吳氏)
셋째 사위이행(李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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